현회사에 입사한 지 대략 5개월이 지났다. 의도치 않게 현재 기획, 디자인, 프론트엔드 개발까지 총 3개의 업무를 맡아서 일을 하고 있다. 진짜 의도한 게 아니었으며... 사람은 자기가 뱉은 말을 따라가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왜냐면 내가 2024년 회고에 위와 같은 말을 했기에... 면접때는 분명 이사님이 기획 업무를 하고 계신다고 했으나 사실은 팀장님이 하고 계신 거였고, 심지어 팀장님은 전문적으로 PM, 기획 업무를 해오신 분이 아닌 전산 업무 및 인프라를 하고 계셨던 분이기에 정말 경악스러울 정도의 산출물을 넘겨줬었다. 진짜 경악 그 자체이다. 분명 한글로 써져 있는데 이해하지 못할 수준이다. 근데 또 바쁘다는 이유로 업무를 넘겨주지 않으니 내가 다음 기능 개발을 못하는 상태로 붕 떠버리는 순간들이 입사 때부터 발생했다. 그렇다고 내가 직급을 뛰어넘어 직접 고객한테 요구사항을 받아올 순 없잖아... 위아래가 있는 건데... 결국 공식적으로 내가 이 업무를 가져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며 여러 논의와 싸움 끝에... 내가 가져가게 되었다.
디자인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올 수 밖에 없었다. 디자이너가 없는 팀이었으며 내가 또또또~ 사용성과 사이드 이펙트에 민감한 타입이라 여러 케이스를 직접 그려봐야지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그래서 피그마로 여러 케이스를 그려보며 어라? 이건 불편할 것 같은데?를 하나하나 기록 겸... 디자인 시안을 쭉 그리고 있다.
아무튼 더 자세한 회고는 1분기 회고로 따로 작성하는걸로 하고 기획 및 디자인을 약 5개월 동안 진행하며 느낀 점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기획은 주니어가 하기엔 어렵다
내가 다니고 있는 현회사는 극남초 회사에 IT기업도 아닌 제조업이며 연령대가 아주 높다. 아빠뻘분들이 우리 팀의 고객인 건데 그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어차피 B2B니까 그냥 고객이 해달라는대로 해주면 되긴 하는데, 그 요구사항이 수시로 바뀐다는 거고 갑자기 딴 말을 한다거나... 의도가 아예 바뀐다거나... 아무튼 모든 상상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심지어 모든 게 말로 전달되며 기록에 민감한 내가 기록해서 문서를 전달해도 보질 않는다는 것이다. 근데 그거에 대해 뭐라 못하는 게 애초에 이 분들이 자리를 자주 비우실 정도로 바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B2B인데... 요구사항을 말해줄 사람도, QA를 해줄 사람도, 담당자도 공석이라는 의미이다. 그걸 내가 옆에서 알아서 챙기고 알아서 센스 있게 파악해서 기획을 짜야하는데 이게 앵간해선 주니어가 하기엔 힘들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리고 아빠뻘한테 부정적인 이야기 하는거 진짜 쉽지 않다... 진짜로 8ㅅ8.... 요구사항이 뿔어나버릴때 선을 딱 그어야 하는데 그게 진짜 쉽지 않다... 난감한 부탁을 할 때도 지금 그 기능을 개선하는 것보단 이 기능 개발이 더 먼저일 것 같은데...라고 생각해도 고객이 "불편해 죽겠는데 어떻게 쓰라는 것이냐"라고 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린다. 웃긴 건 그 불편하다는 게 CS프로그램에서나 가능한 목록 필터링을 별도의 윈도우 창을 띄어달라는 것이다. 이게 물론 가능은 한데 상태관리에서 편법을 써야 하는 이상한 로직을 짜줘야 한다. 생각보다 복잡하며... 이미 좋은 UX로 제공하는 필터링이 있는데 그게 싫다는 것이다. 왜냐? 이미 10년도 더 된 기존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필터링 기능을 사용했기에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나는 그 편법 로직을 짜는데 2~3일 정도가 걸렸으며 다른 우선순위 업무들을 뒤로 미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기능 개발을 해줘서 총 고객 10명 중에 그분 1명만 쓰고 계신다.
그래 1명이라도 써주면 된거야...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엔 여러모로 현타가 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이 내가 연차가 높았더라면... 선을 딱 그을 수 있었으려나 싶다.
UX란 상대적인 것 같다
나는 사용성, 즉 좋은 UX란 어느정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어느 정도 보편적이며 자주 등장하는 UI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B2B를 경험해 보며... 그냥 고객이 좋다 하면 장땡이려나 싶다. 물론 B2C는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하지만 (사소하게는 페이지의 레이아웃 자체가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니까) B2B는 말도 안 되는 페이지를 만들어 달라고 해도 고객이 편하다고 하면 그게 곧 좋은 UX가 되는 건가 싶더라.
예를 들면 위와 같이 목록 헤더 셀 넓이가 좁아서 글씨가 미처 다 노출이 못된 채 ...으로 처리되고 있는데 이게 고객이 요구한 것이라는 것! 이유는 셀 크기가 넓어지면 가로 스크롤이 너무 길어져서 자기가 일일이 스크롤을 움직여가며 보기 싫다는 것이다. 어차피 본인은 이걸 20년을 보고 있는 목록이다 보니 대충 칼럼의 위치만으로 무슨 내용인지 알기에 글씨가 다 보이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input의 label 글씨 크기가 미친듯이 작다. 진짜 한눈에 글씨가 다 안 보여서 원하는 입력칸을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정도이다. 이 부분도 처음에 보고 기겁한 부분인데... 동료의 말로는 고객이 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input의 border가 빨간색으로 된 것도 필수값이라서 빨간색이고 그게 아니라... 그냥 중요한 값이니 빨간색 처리를 해달라고 요구했다더라. 이거 말고도 input disable가 싫다고 하더라. 이유는 마치 입력해야 할 것 같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는데...^_ㅠ.... 애초에 입력도 하면 안 되는 값이라면 안 보이게 숨기게 해달라고... 괜히 있으니까 입력해야 될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disable 처리한 건데... 색상도 막힌 것처럼 다르잖아요?라고 설명해 드리니 아무튼 싫댄다.
그전 회사에선 매출을 올리기 위해 치열하게 화면을 개선하고, 좋은 레이아웃, 편리하며 브랜드를 잘 파악할 수 있게 하는 UI, 좋은 사용자의 경험을 고민하며 디자이너와 AB테스트도 해보며 고민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여기선 나 혼자 그런 고민을 해봤자 고객이 싫다 하면 어차피 말짱 도루묵이다. 그럼 고객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되는 거 아니냐 뭘 그리 싫다며 찡찡거리냐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게 처음부터 요구사항을 명확히 말해주면 문제가 안 되겠지. 말은 없고 불편해서 못 쓰겠다고 해서 대중적으로, 보편적으로 널리 쓰이는 형태로 만들어줬더니 이 또한 불편하다고 하니... 진짜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면 되니까 고민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머리가 굳는 느낌.
개발자에겐 독이다
인트로처럼... CTO가 되려는 길, 오히려 럭키비키~란 마음으로 임하며 5개월을 버텨냈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니다. 확실히 개발자에겐 독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다음 Next를 생각하기에 급급함]
이란 것이다.
물론 회바회, 어떤 도메인인지, 비즈니스인지에 따라 다르겠으나 우린 B2B 회사로서 인력이 나 1명, 백엔드 1명뿐인 회사로서... 내가 플젝 개선하겠다고 유지보수 기간을 잡아버리면 백엔드의 공식 업무가 사라져 버린다. 내 개발 업무에 집중하려면 어느 정도 기획물들을 쌓아놓고 해야 한다. 그럼 결국 개발 업무는 일을 쳐낸다 식으로 마무리 짓게 되고 빨리 다음 기획, 다음 기획, 다음 기획, 다음 디자인, 다음 디자인... 이렇게만 되어있더라.
그리고 IT 기업이 아니다보니 모든 구성원들의 개발자의 문화랄까? 그런 인식이 낮은 것도 문제다. 질 좋은 코드는 곧 좋은 품질의 프로덕트라는 걸 잘 인지 못하는 것 같다. 질 좋은 코드를 만들어내려면 내부적으로 쌓아가는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한데, 고객과 비개발직군이 보기엔 눈에 보이는 새로운 기능, 개선이 없으면 일 안 했다고 판단하기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발 업무에 집중하기 너무 어렵다. 한창 개발 조지고 있을때 고객한테 수시로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쉽지 않다. 가끔 작업 중이던 모든 코드를 돌려서 디버깅해봐야 할 때도 있고... 그러면 정신이 빠진다. 업무 효율성이 극악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여기서 느낀 게 개발자가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분위기가 조성된 회사가 참.. 멋지고 좋은 회사구나 싶더라. 내 전 회사가 그랬었다. 난 왜 그 좋은 걸 몰랐을까 싶더라.
아무튼 난 거의 리더나 다름 없는 상태
아무튼
기획자로서 고객과 직접 미팅하며 요구사항을 수립하고, 정리하고, 문서화하고, 프로세스를 만들고, 일정 관리를 하고 있고
디자이너로서 고객이 원하는 UX를 고려해서 UI를 만들며 컴포넌트화 및 사이드 이펙트를 문서화하고 있고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서 배포 파이프라인 구축, 배포 자동화, 코드 리팩토링, 성능 개선, 기능 개발 등등... 다 하고 있으며
거의 가랑이 찢어지는 문어 같은 존재로서 내가 팀장이지 아니면 누가 팀장이겠냐 싶다
다행히 이렇게 원맨쇼를 열심히 한 결과 고객들한테 칭찬을 듣고, 신뢰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전에는 참 욕을.. 많이 먹고 있었더라 (내가 입사하기 전) 여기까지 오는데 쉽지 않았고 아직 한참 멀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우리 팀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에서 조금 올라간 수준이기에 빨리빨리 일을 쳐내서 개선해 주고, 요구사항을 빠르게 들어주고 있다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다가 번아웃 씨게 올까봐 무섭다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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